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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불 덮고 새근새근,봄빛에 뒤적뒤적… 울릉도 ‘나리분지’
채우리1
2008. 3. 7. 12:11
눈이불 덮고 새근새근,봄빛에 뒤적뒤적… 울릉도 ‘나리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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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솜이불을 뒤집어 쓴 나리분지가 깊은 겨울잠에 빠졌다. 눈 속에 웅크린 너와집과 투막집이 숨대롱을 닮은 굴뚝을 통해서 가는 호흡을 할 뿐 설국으로 변한 동화마을은 숨 막힐 정도로 고즈넉하다. 하지만 호수처럼 얼어붙은 나리분지 눈밭에서도 새봄은 자란다. 짙은 향을 머금은 섬백리향과 천궁이 눈 속에서 새싹을 틔우고, 개척민들의 명줄을 이어주던 산나물도 나날이 키를 더하고 있다.
도동항에서 일주도로를 타고 서면을 거쳐 북면의 천부리에 이르기까지 울릉도는 봄빛이 완연하다. 깎아지른 산비탈의 눈 속에서 싹을 틔운 산나물은 초록세상을 연출하고, 태하등대로 가는 고갯길의 아름드리 동백나무는 빨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거친 파도로 끊임없이 한 점 섬을 유린하던 검푸른 바다도 쏟아지는 봄빛에 옥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울릉도 나리분지는 아직도 겨울이다. 천부마을을 벗어나 4㎞ 길이의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달리면 계절은 봄에서 겨울로 거슬러 오른다. 도로 양편에 쌓인 눈이 점점 높아지더니 급기야 자동차 지붕보다 높아진다. 호젓한 산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 나오는 것처럼 눈터널로 이뤄져 있다.
고갯마루의 나리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나리분지는 눈부신 은세계다. 나리분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나리교회의 윤곽만 뚜렷할 뿐 키 낮은 민가는 지붕만 살짝 드러낸 채 눈 속에 묻혀 있다.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구절양장 도로만 없다면 성인봉 자락에 둘러싸인 나리분지는 고립무원의 세상 그 자체다.
분지에 쌓인 눈은 어른 키보다 높은 2∼3m. 1월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녹을 사이도 없이 하루가 멀다고 쌓이고 쌓여 마침내 민가마저 덮어버린 것이다. 50년 만에 내린 대폭설이었다. 심지어 나리분지를 찾은 삼일절 아침에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분지를 둘러싼 산봉우리의 나목들은 춘삼월 설화처럼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는 특이하게도 칼데라(분화구) 속에 자리잡았다. 강력한 화산 폭발로 생긴 분화구 안에 화산재가 쌓이면서 분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울릉도 최고봉인 성인봉(984m)도 이 화산 폭발로 생겨났다. 그 후 다시 화산이 폭발하면서 나리분지 안에 알봉분지가 형성됐다.
고갯길을 내려오면 나리분지가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나리분지는 동서 1.5㎞, 남북 2㎞로 면적이 198만㎡(60만평)에 이른다. 눈 씻고 찾아봐도 평지라고는 없는 울릉도에서 나리분지는 육지의 평야에 버금가는 광활한 들녘인 셈이다. 그래서 1882년 고종황제의 개척령 반포로 울릉도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도 나리분지였다.
지금은 17가구 40여명이 살고 있지만 나리분지는 한때 500여명의 주민이 살았을 정도로 번창했다. 하지만 드넓은 나리분지는 화산재로 이뤄져 논농사가 불가능한 척박한 땅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더덕 삼나물 참고비 천궁 등 산나물과 약초를 재배하거나 음식점과 민박집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나리'라는 지명도 과거 개척시절에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한 데서 비롯됐다.
하룻밤 사이에도 1m 높이로 폭설이 쏟아지면서 설원으로 변한 나리분지. 그곳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 그리고 집과 집을 연결하는 샛길은 모두 수로처럼 생겼다. 포클레인으로 눈을 파내 길을 만든 때문이다. 얼어붙은 눈 위에 또 눈이 내려 도로 양쪽에 쌓인 눈 언덕의 단면은 해안도로에서 만나는 절벽의 지층과 다름없다.
나리분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는 알봉분지로 가는 남쪽 끝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 자동차가 갈 수 있는 대동맥인 셈이다. 큰길에서 띄엄띄엄 떨어진 집까지는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댈 정도의 폭으로 눈을 파내 길을 만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실핏줄 같은 고샅길을 통해 교회도 가고 마실도 가면서 한겨울 같은 봄을 보낸다.
이따금 봄의 설경을 만끽하기 위해 찾아온 여행객들과 나리분지에서 알봉분지를 거쳐 성인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탄성만 분지 안에서 메아리칠 뿐, 꽁꽁 얼어붙은 나리분지는 침묵의 공간이다. 쌓인 눈이 모두 녹는 4월 말까지 나리분지 주민들에게 지긋지긋한 겨울은 계속된다. 겨우 십리 떨어진 천부리의 동백꽃 소식도 이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한 해의 절반이 겨울인 나리분지의 겨울나기는 독특하다. 사륜구동차로도 역부족이어서 네 바퀴에 쇠사슬 체인을 동여매고 이웃에 마실이라도 가려면 설피를 신어야 한다. 지금은 몇 채만 남아있지만 전통가옥인 투막집과 너와집의 처마 끝에서 땅바닥까지 기둥을 세우고 억새나 옥수숫대로 외벽을 설치한 우데기도 겨울철 집안에서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숲 속에서는 숲을 볼 수 없듯이 나리분지의 전경을 제대로 보려면 눈 덮인 산을 올라야 한다. 나리분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말잔등(967m)에서 나리봉(813m)에 이르는 능선. 4∼5m 높이의 눈이 쌓인 능선에 오르면 마치 얼어붙은 천지나 백록담에 눈이 내린 듯 나리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분지 너머로는 송곳산과 송곳봉이 우뚝 솟아있고 다시 그 너머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우리나라 최후의 설국. 울릉도 나리분지는 춘삼월 봄날에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울릉도=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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