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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길’

채우리1 2008. 8. 11. 19:37

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길’


 

사각형 모습의 연못 안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우리네 선인들은 지구가 사각형이라는 생각에 연못을 네모나게 만들었다던가.
조선 중기의 인물 오희도 역시 지구는 둥글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사각형 모양의 연못과 정자를 만들고는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안빈낙도했다. 마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간 덕에 한없이 적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명옥헌 주위에 펼쳐진다.

명옥헌이 들어선 이곳은 지실마을, 이름부터가 곱고 운치 있다.
마을길은 좁지만 길이 좁아야 소란스럽지 않다는 말은 지실마을에 딱 어울린다.
예컨대 길이 좁다고 해서 전혀 흉 될 게 없는, 길이 좁다고 해서 전혀 불편할 게 없는 곳이 지실마을이다. 마을 위쪽 산자락의 과수원은 온통 푸른 기색이다. 문을 닫아 건 농가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담 대신 꽃밭이 펼쳐지고, 마당에서는 견공들이 장난치며 뛰논다. 집 주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나희덕 시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명옥헌에 갔다가 꽃을 잘 가꾼 집이 있어 무심코 들어섰단다. 강의가 없는 날에 작품도 쓰고 책도 읽을 공간을 지실마을 어디에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단다. 시인은 방 하나 얻을 수 있겠냐고 말을 건넸고, 집주인은 방이 비어 있기는 한데… 운을 뗐다. 방을 얻으려는 사람 방을 지닌 사람 간의 대화가 오간다. 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산리 은행나무가 길을 재촉하다

방 얻으러 갔던 나희덕 시인을 애타게 한 사람은 감 농사를 짓는 정선임씨다. 나 시인의 얘기를 들려줬더니 정 씨는 “시인에게 책도 빌려보고 괜찮을 뻔했다”면서도 “집의 정기를 지키기 위해 요즘엔 내가 안채에서 잔다”고 했다. 나 시인이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내가 이미 세 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던 셈이다. 연자방아 옆에는 주목과 버금간다는 구상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명옥헌이 선비 정신 깃든 정원이라면 나희덕 시인이 방을 얻으려 했던 정선임 씨네는 농군의 정신이 깃든 정원으로 손색이 없다.

자연을 벗하며 살기 위해 낙향한 오희도를 곁에 두려고 능양군(훗날의 인조)이 찾아와 타고 왔던 말을 매두었다는 후산리 은행나무와 일별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광주호 곁의 소쇄원 입구에 들어서니 대숲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숲 옆의 돌담까지 산책을 나온 다람쥐 한 마리가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람쥐에게 신뢰를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자연 속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과도 맥락이 통하고,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것과도 맥락이 통한다. 다른 문화재들과 달리 모든 문이 열려 있다. 아궁이 위 벽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낙서장으로 변했지만 그게 밉지 않다. 낙서 역시 소통의 공간인 것이다. 더구나 이곳 소쇄원은 조선 때 사람 양산보가 은둔하며 자연을 벗했던 곳이고,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에 철없는 사람들의 몇 글자 낙서가 큰 흉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왕죽이 늘어서서 하늘을 가리는 그곳

제월당과 광풍각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쇄원은 양산보의 15대 후손들이 가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쇄원을 겉멋 들게 하는 데는 아예 관심이 없다.
계곡과 계곡 사이에는 나무 장대 하나 걸쳐놓아 그 위로 물 흐르는 모습 보게 하고, 사람들이 대숲에 들어가 죽순을 망치게 하지 않도록 울타리를 쳤을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화두가 떨어진다. 양산보는 삶을 마감하기 전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이 동산을 남에게 팔지 말라. 어리석은 후손에게도 물려주지 말라.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유훈을 남긴 이도 아름답고, 그를 그대로 따르는 이들도 아름답다.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면 인공미가 전혀 없는 소쇄원은 지금 우리 곁에 없을 일 아닌가.

문득 메타세쿼이아길이 그립고, 죽녹원이 그립다.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창평 국밥 한 그릇도 그립다.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선 길은 한 폭의 그림과 다름없다. 당차게 솟아오른 수직의 구현, 군더더기 없는 매끈함이 새로운 길의 아우라를 만든다. 그 길로 들어서면 자동차도, 사람도 문득 속도를 줄여 길속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다. 느림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제 메타세쿼이아 길은 담양 여행의 아이콘과 다름없다. 유독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이 매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한 군데 비뚤어지지 않고 뻗어 올라가는 생태적 특성이 담양의 또 다른 자부심인 선비 정신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 길이 전국 어느 곳보다 길고 깊게 숲을 만들고 있으니 녹음이 우거지면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자동차 행렬이 이어진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벗하다가 죽녹원으로 들어선다. 거기 새로운 길이 있다. 소쇄원의 대숲과는 또 다른 대숲의 진경, 왕죽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대숲 사이의 길들은 좁다. 좁은 길의 의미 역시 명옥헌이 자리한 지실마을에서의 길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길이 좁아야 마주 오는 사람과 눈인사도 할 수 있다. 길이 좁아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사람끼리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다. 시인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내가 이미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고. 대숲의 좁은 길 역시 그렇다. 그 길을 가며 옷깃이 스쳤을 때 우리는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얼마간 세 들어 살고, 우리 마음속에 얼마간 타인이 거처할 마음의 집을 세놓는 것이다.

/글·사진 임동헌(소설가·여행가)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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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코스: 소쇄원→식영정→지실마을 명옥헌→메타세쿼이아길→죽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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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가 죽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돌아와 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민간 정원이다. 학자들은 이곳에 모여 휴식을 취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 활동을 벌였다. 제월당과 광풍각이 들어서 있고 자연미를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식영정 앞에서 좌회전 문의 061-382-1071, www.soswaewon.org

식영정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다. 조선 중기 학자 정철이 머물던 곳이며 여기서 ‘성산별곡’을 지었다. 소쇄원보다 30년 늦게 지어졌으며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해 경관이 빼어나다.
위치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나들목 지나 887번 지방도로에서 5.3km
문의 061-380-3154, www.damyang.go.kr/tourism

지실마을
명옥헌
조선 중기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명옥헌을 짓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가꿨다. 소쇄원과 함께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위치 식영정 옆 한국가사문학관 뒤편 문의 061-380-3154

메타세쿼이아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로수 길. 메타세쿼이아는 멸종돼 화석으로만 남아 있는 줄 알았으나 1940년대 중국에서 발견된 이후 가로수로서 명성을 높여가고 있다.
위치 담양 대나무건강랜드 지나 바로 문의 061-380-3154 www.damyang.go.kr/tourism

죽녹원
담양 특산물인 대나무를 아이콘으로 산책 숲을 조성한 공원. 야외 광장을 별도로 두고 총 8개의 길로 구분해 선비의 길, 철학자의 길, 죽마고우의 길 등으로 숲길 이름을 붙여 추억을 쌓기 좋도록 꾸몄다.
위치 담양터미널과 문화회관 지나 좌회전 문의 061-380-3154 www.damyang.go.kr/tourism



※위에 소개된 내용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행한 ‘대한민국 보고보고 시리즈2-한국의 길, 가슴을 흔들다(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대한민국 보고보고 시리즈’는 문화 예술 콘텐츠와 여행이 결합되는 새로운 컨셉트로 각각의 주제가 여행 장소와 이어지는 인문 여행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