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길’
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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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 모습의 연못 안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명옥헌이 들어선 이곳은 지실마을, 이름부터가 곱고 운치 있다. |
나희덕 시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명옥헌에 갔다가 꽃을 잘 가꾼 집이 있어 무심코 들어섰단다. 강의가 없는 날에 작품도 쓰고 책도 읽을 공간을 지실마을 어디에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단다. 시인은 방 하나 얻을 수 있겠냐고 말을 건넸고, 집주인은 방이 비어 있기는 한데… 운을 뗐다. 방을 얻으려는 사람 방을 지닌 사람 간의 대화가 오간다. 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산리 은행나무가 길을 재촉하다
방 얻으러 갔던 나희덕 시인을 애타게 한 사람은 감 농사를 짓는 정선임씨다. 나 시인의 얘기를 들려줬더니 정 씨는 “시인에게 책도 빌려보고 괜찮을 뻔했다”면서도 “집의 정기를 지키기 위해 요즘엔 내가 안채에서 잔다”고 했다. 나 시인이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내가 이미 세 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던 셈이다. 연자방아 옆에는 주목과 버금간다는 구상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명옥헌이 선비 정신 깃든 정원이라면 나희덕 시인이 방을 얻으려 했던 정선임 씨네는 농군의 정신이 깃든 정원으로 손색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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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벗하며 살기 위해 낙향한 오희도를 곁에 두려고 능양군(훗날의 인조)이 찾아와 타고 왔던 말을 매두었다는 후산리 은행나무와 일별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광주호 곁의 소쇄원 입구에 들어서니 대숲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숲 옆의 돌담까지 산책을 나온 다람쥐 한 마리가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람쥐에게 신뢰를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자연 속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과도 맥락이 통하고,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것과도 맥락이 통한다. 다른 문화재들과 달리 모든 문이 열려 있다. 아궁이 위 벽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낙서장으로 변했지만 그게 밉지 않다. 낙서 역시 소통의 공간인 것이다. 더구나 이곳 소쇄원은 조선 때 사람 양산보가 은둔하며 자연을 벗했던 곳이고,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에 철없는 사람들의 몇 글자 낙서가 큰 흉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왕죽이 늘어서서 하늘을 가리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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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과 광풍각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쇄원은 양산보의 15대 후손들이 가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쇄원을 겉멋 들게 하는 데는 아예 관심이 없다. |
문득 메타세쿼이아길이 그립고, 죽녹원이 그립다.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창평 국밥 한 그릇도 그립다.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선 길은 한 폭의 그림과 다름없다. 당차게 솟아오른 수직의 구현, 군더더기 없는 매끈함이 새로운 길의 아우라를 만든다. 그 길로 들어서면 자동차도, 사람도 문득 속도를 줄여 길속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다. 느림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제 메타세쿼이아 길은 담양 여행의 아이콘과 다름없다. 유독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이 매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한 군데 비뚤어지지 않고 뻗어 올라가는 생태적 특성이 담양의 또 다른 자부심인 선비 정신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 길이 전국 어느 곳보다 길고 깊게 숲을 만들고 있으니 녹음이 우거지면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자동차 행렬이 이어진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벗하다가 죽녹원으로 들어선다. 거기 새로운 길이 있다. 소쇄원의 대숲과는 또 다른 대숲의 진경, 왕죽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대숲 사이의 길들은 좁다. 좁은 길의 의미 역시 명옥헌이 자리한 지실마을에서의 길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길이 좁아야 마주 오는 사람과 눈인사도 할 수 있다. 길이 좁아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사람끼리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다. 시인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내가 이미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고. 대숲의 좁은 길 역시 그렇다. 그 길을 가며 옷깃이 스쳤을 때 우리는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얼마간 세 들어 살고, 우리 마음속에 얼마간 타인이 거처할 마음의 집을 세놓는 것이다.
/글·사진 임동헌(소설가·여행가)
여행 정보 ■추천 코스: 소쇄원→식영정→지실마을 명옥헌→메타세쿼이아길→죽녹원 소쇄원 식영정 지실마을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 |
※위에 소개된 내용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행한 ‘대한민국 보고보고 시리즈2-한국의 길, 가슴을 흔들다(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대한민국 보고보고 시리즈’는 문화 예술 콘텐츠와 여행이 결합되는 새로운 컨셉트로 각각의 주제가 여행 장소와 이어지는 인문 여행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