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 막걸리를 마시면 /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 영양분이 많다 /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천상병, <막걸리>
막걸리 이야기에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가 빠질 수 있겠는가. 애주가 시인에게 술을 배웠다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주당이 되었으리라. 시 한 구절에 벌써 군침이 넘어간다. 미리 밝힌다. 막걸리 기행은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는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도 막걸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오롯이 드러낸다. 이 시는 술시(戌時)를 기다리게 하고 그중에서도 막걸리를 우선으로 찾게 한다. 대체 막걸리의 무엇이 그리도 시인을 흡족하게 했던 것일까. 궁금해졌다. 막걸리의 정체가.
80년 넘게 이어진 양조장을 찾아서
우리 술, 막 걸러냈다고 ‘막걸리’라 불리는 그는 전국 각지에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서울에는 장수막걸리, 포천에는 이동막걸리와 일동막걸리, 저 멀리 부산에는 금정산 막걸리 등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막걸리가 존재하지 않던가. 전국 지역별 막걸리가 표기된 ‘막걸리 지도’를 펼치니 가슴이 뛴다. 어디부터 가볼까. 어떤 막걸리부터 맛볼까.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에 자리한 세왕주조. 양조장을 엄호하듯 측백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측백나무는 보기 좋을 뿐 아니라 빛과 해충을 막고 바람을 막아준다
첫 번째 주인공은 충북 진천에서 나는 ‘덕산막걸리’로 정했다. 80여 년 전 지어진 양조장에서 3대째 대를 이어 술을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100화 ‘할아버지의 금고’ 실제 배경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에는 양조장 건물 자체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랜 시간 묵혀둔 진한 이야기를 품고 있으리라. 기대감을 안고 충북 진천의 덕산면 용몽리에 자리 잡은 세왕주조(구 덕산양조장)를 찾았다.
한적한 시골마을 큰 길가로 들어선다. 늘씬하게 뻗은 측백나무가 엄호하듯이 오래된 목조건물을 감싸고 있다. 덕산막걸리가 생산되는 세왕주조다. 길 건너에는 세왕주조 술독 모형의 세왕전통주 홍보교육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술밥이라고도 하는 고두밥을 만들어 말리는 일은 고되다. 막걸리를 만드는 첫번째 일이다. 고두밥을 말려낸 다음 1차로 항아 리에 담아두고 2~3일 뒤 효모균이 배양된 고두밥을 2차로 넣어 숙성시켜 막걸리를 완성한다
일요일 아침, 벌써 고두밥(술밥, 당화를 쉽게 하기 위해 멥쌀과 찹쌀을 찐 것)을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발효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술독에서 느긋하게 술이 익어간다. 보오~글 보오~글, 천천히 부풀어 오른 거품은 겹겹이 층을 이룬다.
술도가의 비밀을 품은 발효실 입구와 전경. 고희를 넘긴 술 항아리 역시 세왕주조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다. 시큼하면서 또 달큰한 냄새가 공기 구석구석 퍼져있다
<왼쪽> 발효실에 들어서면 시큼털털한 누룩냄새가 반겨준다. 독에 적힌 ‘1935 용몽제(龍夢製)’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이 대표 가 중학생때까지만 해도 인근에 점촌이 있었다고. 진천은 예로부터 토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오른쪽> 이게 바로 4단으로 생성된 효모균. 천천히 부풀어 오른 거품이 가득이다. 막걸리의 맛과 도수 등 완급을 조절해준다
“쌀로 빚은 술은 거품이 층을 져서 올라와요. 이것 보세요. 4단 층층 거품이죠. 풍선껌처럼 빵빵 터지지도 않아요. 천천히 오래도록 부풀어 있다 가시지요. 이 술독 좀 보세요.”
‘1935, 용몽제(龍夢製)’라고 적혀있다. 나이로 치자면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어르신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했던가. 살아서 진천이라, 그만큼 살기 좋다는 뜻일게다. 물 좋고 공기 좋으니 맛있는 쌀이 날 터이고 그 쌀로 정성껏 지어낸 술은 또 오죽 맛있을까. 덕산막걸리는 진천쌀, 지하 150m의 천연 암반수에 ‘좋은 술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더해져 완성된다.
깨끗한 자연환경과 정성으로 빚어낸 우리 술
세왕주조 양조장 길건너 새로 지은 세왕전통주 홍보교육전시관(사진 왼쪽) 전경. 세왕주조 대표의 막걸리 강의 및 실습, 시음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미리 문의하면 양조장과 함께 견학할 수 있다. 바로 옆에 술병을 옆으로 뉘여 놓은 모형의 '향주가'(사진 오른쪽)가 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근처에 점촌이 있었어요. 용몽리는 유명한 옹기 산지였지요. 여기 있는 항아리도 제가 태어나기 전 만들어져 술을 익혀왔어요. 양조장이 1930년에 지어졌으니 세왕주조와 일평생을 함께 해 온 셈이죠.”
1929년, 할아버지 이장범 옹이 시작, 부친 이재철 씨의 뒤를 이어 3대째 술도가를 이어가고 있는 세왕주조 이규행 대표와 부인 송향주 이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3대째 세왕주조를 이끌고 있는 이 대표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술은 사람이 빚는 것’이라 들어왔다”며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술 맛이 변한다”고 했다. 똑같은 재료와 환경으로 만들어도 빚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술맛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왼쪽> 세왕주조 사무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중 ‘할아버지의 금고’가 이곳에 있다 <오른쪽> 막걸리를 생산해내는데 가장 중요한 균을 배양해내는 종국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사업을 하던 이 대표는 1998년 양조장으로 돌아온다. 양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맨몸으로 부딪혀 하나씩 배우며 익혀온 세월이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한달간 보관이 가능한 ‘생(生) 덕산 쌀 막걸리’도 이때 만들어졌다. 세왕주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이다. 어르신들은 옛날 막걸리 맛이 난다면 흡족해했다. 직판과 대리점, 그리고 이마트를 통해 유통된다. 생(生)검정쌀 막걸리도 많이 찾는다.
고두밥부터 막걸리가 완성될 때까지 대략 8일 정도가 필요하다. 먼저 1차로 고두밥을 항아리에 담아둔다. 2~3일 뒤 막걸리 발효에 필요한 효모균이 배양된 고두밥을 2차로 넣어 숙성시키면 막걸리가 된다.
세왕주조에서 생산되는 막걸리 중 가장 인기있는 제품. 생(生) 덕산 쌀 막걸리1700ml(왼쪽), 생(生) 덕산 쌀 막걸리750ml(가운데), 생(生) 검정쌀 막걸리 1700ml(오른쪽)
생(生) 막걸리의 경우 공장에서 출고된 제품이 완성품이 아니다. 효모균이 계속 살아있기 때문에 김치가 익어가듯 숙성된다. 온도 등 여러 가지 환경 요인으로 맛이 변할 수 있어 대량유통이 어렵단다. 맛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먼저라고. 탄산가스 때문에 꼿꼿이 세워서 보관해야 한다. 이래저래 보관이 까다롭다. 적정온도를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 “여름에는 출고된 지 2~3일, 봄과 가을에는 3~4일, 겨울에는 4~5일 즈음이 가장 맛이 좋다”고 부인인 송향주 이사가 거든다.
세왕주조 인근의 식당에서는 대부분 덕산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제조날짜에 따라 맛이 달라진 다는 걸 기억해두자. 공장에서 출고된 막걸리는 김치가 익듯이 매일매일 익어간다
자, 이제 어디로 덕산막걸리를 맛보러 갈까. 한적한 마을이지만 주변에 선술집들이 있다. 어디를 가도 덕산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마트를 비롯해 ‘피쉬앤그릴’ 체인 주점에서 덕산막걸리를 만날 수 있다.
드디어 덕산막걸리를 맛볼 시간이다. 송 이사는 주전자에 내오는 선술집의 막걸리 맛을 보고 “술을 잘 못하는 내게는 이보다 하루 이틀 전의 막걸리가 입맛에 맞는다”며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약간 진해진, 탄산이 강한 맛을 좋아하기도 한다”고 했다.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러면서 톡 쏘는 맛도 더해진다. 과하지 않게 달근하다. 막걸리 한 잔에 진해지는 가을들판이 그려진다. 하루 한 되(약 1.8리터)의 막걸리만 있으면 흡족하다는 시인이 또 생각난다. 뽀얀 막걸리 한잔 앞에 두고 앉으니 그의 말이 무조건 옳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그저 술만은 아닌 것이다.
여행정보
▶세왕주조(옛 덕산양조장)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왕주조는 미리 문의하면 견학할 수 있다. 현장에서 제품 구매도 가능하다. 양조장과 길 건너편에 자리한 세왕전통주 홍보교육전시관도 놓치지말자. 문의 043-536-3567, www.icnj.co.kr
교통
수도권 서울→중부고속도로→진천IC→21번 국도→덕산면→세왕주조
호남권 광주→호남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진천IC→21번 국도→덕산면→세왕주조
영남권 부산→경부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연풍IC→34번 국도→괴산→증평→초평→513번 지방도→덕산→세왕주조
숙박
진천IC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진천 읍내로 가면 숙박업소들이 제법 있다. 아리아모텔(043-537-2666), 풀하우스모텔(043-535-9930), 아크라모텔(043-536-8454) 등을 이용하면 된다.
진천 볼거리&즐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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