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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길] 울진 선시골

채우리1 2011. 11. 3. 12:19

 


[사람과 길] 울진 선시골

산에 신선이 산다면, 늦가을 정취에 반해서일지 모른다. 높고 푸르던 산봉우리 한바탕 불타오르곤 잦아들어, 벗어던진 이파리들 천지사방에 나뒹구는 깊은 산 고운 골짜기.

 

울진 선시골

 

산에 신선이 산다면, 늦가을 정취에 반해서일지 모른다. 높고 푸르던 산봉우리 한바탕 불타오르곤 잦아들어, 벗어던진 이파리들 천지사방에 나뒹구는 깊은 산 고운 골짜기. 이리 핥고 저리 훑으며 파고드는 바람도 바람이거니와 산길마다 두툼히, 기분 좋은 피로감처럼 쌓인 낙엽들이, 건드리기만 해도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진한 향기를 내뿜는 까닭이다.                                                       글·사진 이병학(한겨레 문화부 기자)


 

산전수전 다 겪어 울그락불그락 할 일도 별로 없는 늦가을. 가을 타는 신선들이 푹신한 낙엽 깔고 둘러앉아, 너럭바위 술상 삼아 잔질 멈추지 않을 듯한 골짜기로 들어가 보자. 경북 울진군 백암산(1004m) 북쪽 자락이다. 백암산 동남쪽 자락 온정리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솟고, 북쪽 사면으론 차고 맑은 내선미천이 흐른다. 7.5㎞에 이르는 내선미천 상류의 좁고 긴 바위골짜기가 선시골이다. 신선들이 노닐 만한 경치라 하여 신선골로도 불린다. 평해읍 앞바다로 흘러드는 남대천의 최상류 물줄기 중 하나다.

 


단풍빛이 현란한 곳도 아니고, 바위절벽에 수십길 폭포가 내리꽂히는 웅장한 골짜기도 아니다. 오직 그윽하고 아기자기하고 맑고 서늘한 맛이 자랑인 계곡이다. 웅장하지 않아도, 걷고 쉬고 보고 즐기는 데 갖출 건 다 갖췄다. 골 전체가 거대한 암반으로 이뤄져, 아담하지만 물소리 짙은 폭포들과깊고 시퍼런소들이 끊임없이이어진다. 보기 드물게깨끗한 바위골짜기를 따라 옛 사람 발길 손길이 녹아든 희미한 옛길도 굽이친다.(옛길 일부엔 최근 나무 탐방로를 설치했다)


한여름에도 매미소를 비롯한 골짜기 들머리 주변만 물놀이객들이 있을 뿐, 상류 쪽으론 길이 험해 본격 산행꾼들만 찾아들던 골짜기였다. 본격 산행꾼들은, 백암온천 쪽에서 출발해 백암산을 넘어 선시골로 내려와 내선미천 하류인 선구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많이 탄다. 하지만 선시골 입구로 올라 서너 시간 물길 산길을 걸어서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한나절 백암산 늦가을 정취를 즐기는 데는 손색이 없다. 이어진 소들과 폭포의 골짜기를 감상하며 낙엽 밟는 소리, 도토리 구르는 소리, 산오리 날아오르는 소리 따위를 귀에 담아 오기에 좋다. 산길에 소나무는 적고, 참나무 등 활엽수들이 우거져 있다.

 


울진군 온정면 선구1리 내선미마을이 계곡 탐방 출발점이다. 마을을 지나 물길로 들어서면, 널찍한 물웅덩이매미소를 시작으로 초록빛 물을 담은 깨끗한 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흐르거나 고이거나 바위에 담긴 물은 투명하기 그지없다. 물 바닥엔 다슬기들과 떨어져 구르다 물을 만난 도토리들이 깔려 있다. 그 위로 굵직한 쉬리·버들치들이 세상에 놀랄 일 별로 없다는 듯이 노닌다.
 

폭포나 물웅덩이들이 장관이라 할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물살에 깎여 만들어진 바위 소들은 검푸른 빛을 띨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이 많다. 최상류까지 이어지는, 볼만한 물웅덩이는 2백 개를 헤아린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웅덩이의 규모가 크거나 깊거나, 특이한 소와 바위들엔 이름이 붙어 있다. 용소(선연·기우제소)·가 매소·매미소(마음소)·호박소(함박소)·숫돌바우(선돌바우) 등이다. 일부 소와 폭포, 바위들은 주민들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다르다. 골짜기에서 사람이 떠난지 오래고, 지형도 바뀐데다, “주민들끼리도 발음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정돌만 씨·60)이다.

산길은 주로 물길을 왼쪽에 두고 오르내린다. 절벽 밑에서 수시로 우렁찬 폭포 소리가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적시고 전해져오는 산길이다. 발길은 가을빛 숲길 따라가면서도, 눈길은 자꾸 초록빛 물길로 간다. 경치가 아름답기는 역시 물길을 만나 골짜기로 내려서서 걷는 쪽이 낫다. 그러나 바위에 막혀 다시 산비탈을 오르거나, 발을 적시며 물을 건너야하는 곳도 있다.

발을 적셔도 숨이 차올라도, 오를수록 새롭고 또 새로워지는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자꾸 상류 쪽으로 이끌려간다. 다가가면 떼지어 날아올라 수십 미터 앞쪽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기를 되풀이 하는 산오리들도 나그네를 이끌어간다.

 


비탈길·돌밭길이 대부분이어서 때로 물에 발을 적시거나, 바위를 안고 넘어야 하던 이 골짜기에 최근 탐방객을 위한 시설물이 들어섰다. 울진군에서“바위계곡과 산길이 험한 데다 등산로가 뚜렷하지 않아 길을 잃을 우려가 있어 설치한”1.8㎞ 길이의 나무데크 탐방로다. 탐방객의 안전을 위해 설치했다지만, 골짜기를 따라 데크와 계단, 출렁다리 등을 설치하느라 훼손된 골짜기가 여러 군데 눈에 띈다. 손쉽게 골짜기 깊숙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이 시설로, 탐방객이 급증할 경우 선시골의 자연생태 훼손이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백암산과 주변 골짜기에 밝은 정돌만(울진군 평해읍) 씨는“이 골짜기는 바닥이 거대한 암반으로 돼 있어 비가 오면 수량이 순식간에 불어난다”며“큰 비가 오면 탐방로 시설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처음, 초등생 아들 손잡고 이 골짜기를 찾았었다는 정 씨는 “그때 물길 따라 오르내리는 데 여섯 시간 반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깊었던 소가 묻히고, 바위들이 이동한 것 말고는그때나 지금이나 청정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선시골 물길의 바위들은 하나같이 작은 자갈돌들이 박힌 모습을 하고 있다. 신생대에 용암이 흘러나와 다른 돌들과 섞여 형성된 화성암 지대다. 멋진 추상화를 품은 바위들이 수두룩하다. 바위에 앉아 초록빛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면, 골짜기 풍경들이 딴 세상 모습으로 담겨 있다. 물살이 햇살 받고 바람결에 떠밀리며 한껏 주름을 잡아 현란한 색세상이 펼쳐진다. 손으로 물을 떠 한 모금 마시니 신선이 따로 없다. 물길은 주령 쪽에서 흘러오는 물길과 백암산에서 내려온 물길이 만나는 합수곡까지 아기자기한 소와 바위의 연속이다. 백암산 정상을 넘어 백암폭포 거쳐 온천 쪽으로 내려갈 생각이 아니라면, 물길 중간에서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게 좋다. 매미소 기점 왕복 네시간 가량.


 

이 골짜기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안개 끼고 구름 가득한 날 이무기가 용소에서 승천하기 위해 날아오르는 걸 주민이 창으로 찔러 몸이 둘로 잘려 떨어졌다. 하나는 하류 쪽 팔선대에 떨어지고, 하나는 울진 바닷가 월송정 주변 용정 부근에 떨어졌다. ’매미소(마음소)란 이름은 주변 산세가 ‘목마른 말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국’(갈마음수형)인 데서 비롯했다. 매미소 옆 바위에 ‘한월주인’ ‘선연동천’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매미소 언덕 위엔 옛날 선

연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정자가 쇠락하자, 한 주민이 정자 목재를 가져다 집짓는 데 썼는데, 그 집마저 20여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선시골 상류 골짜기 이름이 독실(독골·돌골)이다. 1960년대까지 화전민 30여호가 살았고, 선시골 지류인 가매소골(가매싯골)에도 두세집이 있었다.“ 그땐 마을동장이 술받아지고 올라가 동 회의를 독실에서 열었다.”(선구1리 주민 라만억 씨) 몇년전까지 너와집 한 채가 남아있었으나, 집을 둘러싼 중들의 다툼으로 결국 헐렸다.

 


선시골 산길은 독실마을 주민들이 평해장에 나물·버섯·메밀·도토리·장작 등을 내다 팔고 소금·해산물을 사올 때 오고가던 길이다. 선시골엔 항일의병장 신돌석(1878~1908) 장군 이야기도 전해온다. 왜병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전열을 가다듬었다는 곳이다. 조선 중기에 이곳 지리와 경관을 기록으로 남긴 이도 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다 임진왜란 발발 책임 문제로 탄핵돼 평해로 유배왔던 아계 이산해(1539~1609)다. 유배 기간 그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답게 곳곳을 여행한 뒤 그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계유고>에 실린 ‘서촌기’엔 주령(현재 구주령·구슬령·구질령) 밑 협곡의 경관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다.


백암산 주변 주령(구주령)과 선시골일대는 기가 센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당이 와서러 신을 받을라꼬 아무리 별굿을 다하고 공을 디리도 신을 몬 받고 그냥 가는기라. 기가 씨 갖고.”(선구1리 주민 황선암 씨·80) 주민들은 선시골을 신성시해 골짜기 안에선 부정 타는 짓을 하지 않고 개를 잡지도 않는다.
 

선시골엔 일제강점기부터 아연을 생산하던 광산(금장광산)이 있었다. 비포장도로 끝 물 건너편 부근이다. 광산 덕에 일제강점기에 이미 내선미마을(선구1리)엔 전기가 들어왔다. 50년대엔 주민·광원 1천여명이 마을에서 들끓었다고 한다. 음짓말에 사택들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동네 이름을 아예‘사택’으로 바꿔 부를 정도였다. 사택 건물 한 줄에 열 집이 살았는데, 건물이 열줄이나 들어섰었다. 20여년 전까지도 광산이 운영됐고, 사택 건물 한동이 지금도 남아있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풍기나들목~5·36번국도~영주~36번국도~봉화 지나 직진~31번국도 만나 일월·영양 쪽 우회전~영양 문암삼거리에서 평해·온정 쪽 좌회전~88국도~수비(발리)~구주령~울진 온정면 선구리. 선구리에 차를 댈 만한 곳이 마땅치않다. 선구보건소 안이나 선구교 다리 주변에 차를 대고, 내선미천 물길 따라 걸으면 선시골 초입 매미소를 만나게 된다.


묵을 곳
온정리 백암온천관광단지에 콘도·호텔·여관이 많다. 백암 한화리조트(054-787-7001) 객실 23평 평일 7만원, 주말 10만원. 온천욕 9000원.

 

먹을 곳 선구리에서 88국도로 고개 넘어 차로 5분 거리에 온정리 백암온천관광지가 있다. 생선회와 대게 등 해산물, 버섯전골, 물곰탕 등을 내는 식당들이 많다.

 

여행문의 울진군청 문화관광과 054-789-6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