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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을의 정치는 술맛에서 알고, 한 집안의 일은 장맛에서 안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술은 술 이상의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청양 둔송 구기주가 그러하다. 청양 둔송 구기주는 하동정씨 종갓집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전통주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 또 다시 며느리에게 그것을 10대 이상 전수하며 내려 온 것이 바로 둔송 구기주다. 하동정씨 10대째 며느리이자, 전통명인인 임영순씨 또한 구기자를 직접 재배해 술을 빚는다. 둔송 구기주의 백미는 술 마신 다음 날에 알 수 있다. 바로 숙취가 거의 없다는 것. 그것은 둔송 구기주를 빚는 정성어린 손길과 그들만의 제조 비법 때문이다.
호랑이 시어머니와 시작된 술 인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유?” 한눈에 봐도 오랜 여생을 곱게 살아왔을 것 같은 은은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임영순(73, 전통식품명인)씨. 충남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에 자리한 청양 둔송 구기주 명인의 집 앞마당에서 며느리 최미옥(49)씨가 닭 손질을 하고 있다. 기자가 취재 온다는 소식에 간밤에 기르던 닭을 잡았단다. “시골에서 뭐 대접할게 있나유~. 그저 집에서 키우는 닭이나 잡아서 드리는 수밖에유.” 어느 진수성찬이 이보다 더 황홀할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담담함 속에 따스한 정이 느껴진다. 임씨는 구기주 이야기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이야기부터 꺼낸다. “우리 시어머니유? 무서웠지유. 술 떨어지면 호되게 혼났으니께.” 그랬다. 임씨의 시어머니는 일명 호랑이 시어머니였다. 스물 한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 온 임씨는 거추장스러운 한 복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집안 살림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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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는 것도 시어머니 허락을 받고 나서야 잘 정도로 호된 시집살이를 겪었다. 임씨의 시어머니와 임씨의 남편은 술꾼으로 유명했다고. 술이 떨어지면 날벼락이 떨어지니 임씨는 술이 떨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술을 담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술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이 마시는 시어머니와 남편이었지만, 왠일인지 그 다음날에는 그 흔한 술국조차 찾지 않았다. “구기주가 좋은 걸 그제서야 알았지유. 을매나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더라구유. 그리구 젊었을 땐 시어머니가 무섭기만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께 그 냥반도 참 불쌍한 분이란 생각이 들더라구유. 남편 잃고 자식만 바라 볼 수밖에 없었으니께.” 임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둔송 구기주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풀어놓았다.
하동정씨 종갓집 대물림 술의 비법
“제사가 그렇게 많아두 술을 사서 올린 적이 단 한 번두 없어유. 제사라는 게 정성인데 술도 정성으로 올려야지유.” 사실, 임씨가 시어머니에게로부터 배운 둔송 구기주 만드는 법은 하동정씨(河東鄭氏) 가문 대대로 대물림 되어 내려 온 비법이다. 임씨는 종갓집 며느리로서 일년에 제사를 열 차례 정도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제사 때 술을 사서 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늘 정성으로 술을 손수 빚어 제를 올렸다고. 임씨는 하동정씨 가문에 10대째 며느리로 들어왔다. 지금은 11대째 며느리 최미옥씨가 둔송 구기주 비법을 전수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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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 나와보니, 멍석 위에 고두밥이 펼쳐져 있다. 밑술에 넣을 밑밥인 것이다. 고두밥은 잘 식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서늘한 그늘아래 말려야 수분도 빼앗기지 않고 고두밥의 고슬고슬한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고. 둔송 구기주에 들어가는 재료로는 구기자 뿌리, 구기자 잎, 구기자 열매, 두충피 잎, 감초, 들국화 등 몸에 좋은 재료들이 많다. 구기자가 몸에 좋다는 것은 옛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국 노나라에 한 높은 관리가 민정을 살피던 중 나이 어린 소녀가 회초리를 들고서 이빨이 다 빠지고 흰 수염이 난 노인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는 버르장머리 없는 그 소녀에게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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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소녀는 자기가 300살이요, 그 노인은 소녀의 증손자라 하는 것이었다. 300살이나 먹었는데 앳된 소녀의 외모를 가진 비결을 묻자 소녀는 구기자를 먹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한다. 그만큼 구기자가 몸에 좋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구기자는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고, 혈압을 낮춰주며 항암작용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기자술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밑술과 덧밥인데 밑술은 누룩과 쪄낸 쌀가루와 물로 이루어진다. 덧밥은 고두밥과 약초물, 구기자 열매 삶은 물로 구성된다. 우선 누룩은 밀을 씻어서 빻는다. 그것을 발효 시켜 누룩을 만든다. “예전에는 배꽃 필 때 1년치 쓸 누룩을 만들었다고 하대요.” 며느리 최미옥씨가 누룩 만드는 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배꽃 필 때라니. 누룩 만드는 시기도 참으로 낭만적이다. 배꽃이 필 때 누룩을 만든다는 것은 여름처럼 따뜻한 날씨에 누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배꽃 개화기인 4월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싶다. 보온시설이 미미했던 옛날에는 누룩은 거의 배꽃 필 때 쯤, 혹은 여름철에 했었지만 요즘은 겨울에도 따뜻한 방 안에서 누룩을 띠워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씨는 겨울에 누룩을 띠우면 그 빛깔이 여름에는 노랗지만, 겨울에는 거무스름하기 때문에 여름에 누룩을 발효시키는 것이 좋다고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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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술의 재료인 누룩이 완성되면 물과 쌀 빻은 가루를 쪄 내서 그것을 섞어 사나흘 발효시킨다. 이 것이 밑술 또는 종잣술이라고 한다. 다음은 밑술에 넣을 덧밥. 고두밥을 그늘에 말리고 국화, 구기자잎, 구기자뿌리, 두충피 등을 넣어 하루 이상 졸여내고, 구기자 열매는 따로 삶는다. 이 것을 밑술에 넣고 보름에서 20일 정도 이상 발효 시킨다. 이후 건더기를 모두 걸러내고 짜서 보름 동안 다시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쳐야만 16도의 청양 둔송 구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글만으로 이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턱 없이 많다. 그 과정 속에 녹아있는 그들의 정성이 지고지순하기 때문이다. 밑술에 덧밥을 넣고 휘휘 저어 섞자, 불로 가열하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는 모양새가 나타난다. 그것은 누룩이 발효되는 과정이라고 최씨는 설명한다. 지난 번에 담근 술이 완성되었다며 술을 내온 최씨.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한 모금 마셨다. 술은 이미 목 뒤로 넘어 갔는데 은은한 향기가 입 안을 맴돈다. 정갈하면서도 애써 꾸미지 않은 수수함이랄까. 술 한 잔의 고운 자태에 마음이 흔들린다.
고운 자태의 술, 빚는 이의 마음 닮아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가정에서 술을 만드는 것을 금했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차례의 제사와 애주가인 시어머니, 남편 때문에 술 빚는 일을 그만 둔 적이 없었던 임씨. 임씨는 지금까지 술을 만들 때 재료를 아까워하며 만든 적이 없다. “제가 재료를 조금 덜 넣었다싶으면 어느 새인가 오셔서 말없이 구기자 열매를 한 주먹 더 넣으세유.” 임씨의 며느리 최미옥씨의 말이다. “술은 거짓말을 안해유. 넣은 만큼, 정성을 들인만큼 술맛이 나니께유.” 임씨는 전통식품명인으로서 정직하고, 정성스럽게 술을 빚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통식품명인이 된 과정은 이렇다. 마흔 다섯에 사별한 임씨는 후에 구기주의 전통이 가정술로 남기에는 아까웠는지 농촌지도소 계장이 농림부에 명인 자격을 신청했고 심사위의 평가와 여러 절차를 거쳐 전통식품명인 승인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명인이 된 것이 뿌듯했었지유.” 그러나 명인 자격을 받은 후로부터 3년 동안 시판을 하지 않으면 자격을 반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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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가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제사 때문이지 술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자랑스러운 명인 증서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씩이라도 하동정씨 가문의 술, 둔송 구기주를 널리 알리자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청양 둔송 구기주가 탄생된 것이다. 호된 시집살이부터 전통식품명인이 되기까지 쉽지 않은 인생의 길을 걸어 온 임씨. 그러나 지금 임씨는 하동정씨 가문에 대대로 전수되어져 내려오는 청양 둔송 구기주의 명맥을 누구보다 잘 이어내려 오고 있다. 이젠 그 비법을 며느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만든 사람의 마음이 술에 녹아들어서일까. 청양 둔송 구기주의 깊은 맛과 향은 술을 빚는 그네들의 마음을 닮았다. (청양 둔송 구기주 명인 임영순씨 댁 : 041-942-8138)
-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온라인팀 양서연 취재기자(arom0604@naver.com)
◎ 여행정보
청양 둔송 구기주 임영순씨 댁 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 -> 당진 분기점 -> 당진대전 간 고속도로 -> 신양IC -> 운곡면 -> 광암리
◎ 주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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