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기행

양평 용문산 용문사 사찰기행

채우리1 2016. 5. 18. 12:16

 

 

 

 

용문사 사찰기행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고려 우왕 4면(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전해지기도 한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한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부태웠다고 하네요.  또한 한국전쟁때 용문산 전투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그때 불타버려서 천년고찰이지만

다른 천년고찰에 비해 그에 걸맞게 오래된 나무가 많지않다고 하네요

(사찰불교카페에서 발췌함)

 

 

 

 

 

용문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입니다!

20여분 정도 숲속향기 좋은 길을

사브작 사브작 걸어가니 아주 좋았어요~^^

 

 

 

 

 

일주문 초입부터 쭉쭉 뻗은 소나무가

사열해 주듯해 좋았네요~~

 

 

 

 

숲속 볼래길? 이라고 하네요~

도랑물이 졸졸졸 소리가 나름 좋더군요~~

 

 

 

 

 

중간쯤 걸어가다 보면  출렁 다리가 있어요

계곡 건너쪽으로 흔들흔들 건너갈수 있답니다~ㅋ

 

 

 

 

 

잠시 쉬어가는 쉼터예요~

기념품도 있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쉬어갈수 있는 곳입니다~~

 

 

 

 

 

 

 

 

 

 

 

 

 

 

 

 

사천왕문이 보이네요

다리를 건너가면 바로 나옵니다

 

 

 

 

 

절로 들어가는 천왕문(대문)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문

동쪽의 지국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을 차례로 모신

천상계의 가장 낮은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

 

사방을 지키며 사바 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동양 최대의 용문사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이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란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연 기념물 제30호

 

오랜세월 전란속에서도 부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여

천왕목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 받기고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또한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때에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때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 

만추(晩秋)를 만끽하기 위해 주말만 되면 수많은 차량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시절이다. 주말에 다소 여유가 있으면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용문사를 찾아가보자. 그곳엔 천년의 세월을 버티어 온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사에는 일주문이 있으나 사천왕문이 없다. 은행나무가 천왕목(天王木)으로 자리 잡고 있어 사천왕문의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파를 들고 동쪽을 지키는 동방지국천왕(東方地國天王), 보검을 들고 남쪽을 지키는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나삭(羅索)을 들고 서쪽을 지키는 서방다목천왕(西方多目天王), 사리탑이나 은서(銀鼠)를 쥐고 북쪽을 지키는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의 힘을 망라해 은행나무 한그루가 정법을 수호하고 마귀 습격을 방지하는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이 그의 스승인 대경 대사를 찾아와서 심었다는 전설, 경순왕의 맏아들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심었다는 전설,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라는 전설 등을 미루어 볼 때, 천왕목의 나이는 천년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돼 있는 이 은행나무는 나이가 많은 만큼 키도 커서 우리나라의 나무 가운데 가장 큰 57m의 키를 자랑한다. 수관도 넓어 동쪽으로 14m, 서쪽으로 13m, 남쪽으로 12m, 북쪽으로 16m에 달하며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는 11m나 된다. 주위의 모든 나무들보다 2배 이상 큰 탓에 벼락을 맞을 염려가 있어 90m 높이의 피뢰침을 단 철탑을 옆에 세웠다.

이 은행나무와 관련된 다른 전설도 여럿 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톱으로 이 은행나무를 자르려는 순간 톱 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 이 사실을 알렸으며 조선시대 고종이 붕어했을 때에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신령스러운 나무로 인식돼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세종 때에는 종3품 벼슬인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기도 했다.

은행나무는 암수 딴그루이다. 그래서 암나무와 수나무가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자라고 있어야 암나무에 열매가 맺는다고 전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암나무로서 6가마 이상의 은행을 수확하곤 한다. 은행은 알을 감싸고 있는 노랗고 말랑말랑한 육질의 종의(種衣) 때문에 악취가 난다. 알을 보호하기 위하여 방충 효과가 있는 육질의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은행잎에는 진코플라본 글리코사이드라고 하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고혈압, 심장질환 등 성인병 예방치료제로 이용되며 은행에는 빌로볼과 진콜산 등의 성분이 있어 폐결핵, 천식, 오줌소태 등의 치료제로 이용된다.

오래된 은행나무의 특징으로 유주(乳柱)가 있다. 대개 줄기에서 자란 큰 가지에 여인의 유방처럼 밑으로 늘어진 혹이 달리는데 아이를 낳고 젖이 잘 나오지 않은 출산부가 치성을 드리면 젖을 나오게 해준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개금 불사 공덕!

 

공덕과 참회와 발원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무루의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는 기연의 계기가

되기를 불전에 기원합니다 .....

 

 

 

 

 

 

부처님께 옷(개금) 공양!

 

불상의 장엄함은 곧 내마음의 청정한 법성을 장험함이요

개금을 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어리석음을 지우고 맑고 밝은 본래의

청정한 법신으로 돌아가고자 함이라고 한다

그 어떤 불사보다도 부처님 몸에 금으로 단장하는 것은

무량한 공덕이라고 하네요~!!

 

 

 

 

 

용문사 범종루

 

 - 범종루에는 불전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장엄되어 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릴 때 이 불전사물을 울린다.

 

범종루 전면에는 한문으로 ‘梵鐘樓’라는 편액이

뒷면에는 한글 ‘범종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범종에는 노란 은행잎을 조각하였다.

용문 팔경 중에 용문사의 새벽종소리가 가장 으뜸이라고 하니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서 체험해 볼 만 할 것 같다.

 

 

 

용문사 지장전(地藏殿)

- 지장전 편액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의 글씨다.

지장전 내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계신다.

또 그 좌우에는 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용문사 삼층석탑(三層石塔)

 

 - 1989년 선걸스님이 조성한 불사리탑이라고 한다.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은 정면 3칸 팔작지붕으로 1984년에 중건하였다.

안에는 중앙에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셨고 삼면의 좌우에 천불을 봉안하였다.

신중탱과 동종이 있다.

대웅전 편액은 봉은사의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변각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에 오르는 길에 자비무적(慈悲無敵)이란 글을 새겨놓았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면 적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자비로운 사람인지 무자비한 사람인지 되돌아보며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린다고 한다.

우리 모두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용문사 대웅전 내 석가모니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 1790호)

 

- 통일신라 선덕여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한 용문사의

관음전에 모셔진 관음보살로, 청동으로 만든 뒤 금칠을 하였다.

관음보살은 현실세계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의 소매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만들면서 양 무릎을 덮고 있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보살상 양식을 볼 수 있다.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나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보다는 신체의 표현이 덜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이들 작품보다는 시대가 약간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용문사(龍門寺) 대웅전(大雄殿)아래 향좌측(向左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요사(寮舍)를 겸함)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현재 사찰측에는 이 상(像)의 조성(造成)이나 이전봉안(移轉奉安)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1993년에 행했던 개금불사(改金佛事)때도 복장(腹藏)을 열었을 때도

이미 내용물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용문사(龍門寺)는 수양대군이 세종29년(1447)에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해

 불상(佛像) 2구(軀)와 보살상(菩薩像) 8구(軀)를 봉안(奉安)한 일도 있었으나,

한국전쟁시 용문사(龍門寺)가 전소(全燒)하였으므로 이

상(像)은 본래의 용문사(龍門寺) 보살상(菩薩像)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이후 어디서 어떤 연유로 이곳에 봉안되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양식적인 특성으로 볼 때 전형적인 고려후기(高麗後期) 보살양식(菩薩樣式)을 계승한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작(作)으로 판단된다.

 

용문사(龍門寺)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은 상체(上體)를 다소 뒤로 제낀 채

 전신(全身)에는 영락(瓔珞)을 가득 드리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상(像)은 결발(結髮)모습이나

 전신(全身)에 드리워진 영락(瓔珞)과 가슴께의 금구장여(金具裝飾) 등에서

영덕(盈德) 장육사(莊陸寺) 건칠보살좌상보살(乾漆菩薩坐像菩薩)이나

고려말-조선초기 작으로 알려진 청양(靑陽) 운장암(雲藏庵) 철보살좌상(鐵菩薩坐像)·

상주(尙州) 갑장사(甲藏寺)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과 좋은 비교가 된다.

 

상호(相好)는 개금시(改金時)의 현대적(現代的) 표현에 의해 미소가 없어 보이나

작은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양볼에 탄력있게 살이 있는 원만한 얼굴을 보이고 있으며,

높게 결발(結髮)한 고계(高계)에 목조보관(木造寶冠)을 쓰고

양 어깨에 보발(寶髮)이 [ ]식으로 마치 리본처럼 표현되었는데,

 이런 표현은 장육사(莊陸寺) 상(像)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수법이다.

 

그러나, 보관(寶冠)은 머리부분과 꼭 맞지 않을뿐더러 목조(木造)여서

조선전기(朝鮮前期)에 유행했던 보살관(菩薩冠)처럼

양쪽으로 흩날리는 관수식(冠垂飾)을 보이고 있어

원래의 관(冠)이 아니라 후대(後代)에 보수한 것 같다.

 

자세는 완만하게 내려 온 어깨와 당당한 가슴을 하고 수인(手印)은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지은채 길상좌(吉祥坐)를 결(結)하였는데, 가슴에 수식(垂飾)이 달린 1줄의 영락(瓔珞)이 있고,

복부(腹部)에는 군의(裙衣)자락을 묶은 매듭이 보이며,

왼쪽 가슴께는 승각기를 고정시킨 삼각형 금구장식(金具裝飾)이 있다.

 

 이같은 신체에 걸쳐진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목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다가 손목부분에서 한번 접혀지고 오른쪽 소매자락은

 배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였고,

발목부분에서 부드럽게 중첩된 팔자(八字)형을 그리며 양 무릎을 덮고

그 위에는 영락이 장식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은 탄력있는 장대(長大)한

신체에 당당함과 화려함이 넘치는데, 이렇듯 고계(高계)나 가슴과 양 무릎에

 영락이 드리워진 점, 왼쪽가슴에 삼각형의 금구장식이 있는 점은 전형적인

 14세기 보살양식을 보여주지만 장육사(莊陸寺) 상(像)과 비교할 때

영락(瓔珞)이 다소 간략해지고, 파계사(把溪寺)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1447년 이전)보다는 상호나 신체가 덜 경직된 느낌을 주므로 장육사(莊陸寺) 상(像)(1395)과 같은

 시기이거나 그보다 조금 늦은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좌상은 장육사 건칠보살좌상(1395, 보물 제 933호)이나,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1447년 이전, 보물 제 992호) 등과 더불어

 고려말과 조선초의 조각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사찰불교카페에서 발췌)

 

 

 

 

 

은행나무 앞길엔 소망을 적은 메세지가

주렁주렁 가득 걸려있다  ~

 

 

 

 

 

소망 메세지!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겠죠!

지금쯤은 이루어 졌으리라 믿어봅니다

 

 

 

 

 

 

 

 

 

 

 

 

 

 

 

용문사(龍門寺) 경기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782  031-773-3797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홈페이지 : http://www.youngmunsa.biz